왜 하필 내가 따돌림 당했을까? – 당신이 따돌림 당한 진짜 이유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과거의 상처를 따라가다 보면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갖고 있는 왕따의 기억입니다.
과거의 상처가 자존감을 어떻게 갉아먹는지는 [자존감 높이는 법 3편]에서 따로 정리해두었습니다.
이 글은 그중에서도 ‘따돌림’이라는 한 가지 상처를 깊게 들여다보는 글입니다.
누군가에게 맞은 것도 아니고
상처가 될 만한 심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급식실에서 혼자 앉아 밥을 먹었고
조를 짜라고 하면 마지막까지 남았고
내가 얘기하면 전체가 잠깐 조용해졌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원래 하던 얘기로 돌아갔습니다.
그 짧지만 길게 느껴지던 순간
그 시간이 학기 내내 반복되었던 거죠.
시간은 많이 흘렀습니다.
졸업한 지 오래됐고, 이젠 그시절 애들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따돌림의 영향은 남아 있습니다.
회의에서 내 의견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으면 심장이 덜컥하고
단톡방에서 내 얘기에만 30분째 답이 없으면,
내가 혹시 뭘 잘못 썼나 싶어 다시 읽어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나였을까요?
왜 하필 내가 따돌림을 당했던 걸까요?
그냥 운이 나빴던 걸까요.
아니면 정말 나에게 이유가 있었던 걸까요.

왜 하필 나였을까?
아마 여러분은 그동안 계속 ‘자기’ 안에서 따돌림의 원인을 찾으셨을 겁니다.
내가 어두워서. 내가 눈치가 없어서. 내가 만만해 보여서.
그런데 심리학 연구들이 주목하는 곳은 개인의 특성이 아닙니다.
‘나와 교실 사이’ 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교실에 놓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1. 조용한 나와, 시끄러운 반
따돌림에 대한 한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어떤 아이가 따돌림을 당하는가”를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아이가 자기 반 평균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를 봤습니다.
그 결과 따돌림 피해를 예측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친구 수가 반 평균보다 적은 것.
그리고 반 평균보다 덜 시끄러운 것.
여기서 중요한 건, 조용하다는 게 그 자체로 문제가 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반이 시끄러운 반이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만약 같은 성격의 아이가 전반적으로 차분한 반에 배정됐다면,
그 아이는 그냥 평범한 아이였을 겁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고요.
이걸 전문 용어로 『인물-집단 불일치』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내 특성이 아니라
내 특성과 그 교실 평균 사이의 거리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조용하고 어두워서 따돌림을 당했다”가 아니라,
“내 밝기가 그해 그 반의 기준보다 낮았다.”
그리고 이 기준은 반마다 다릅니다. 매년 바뀌기도 합니다.
작년까지 아무 문제 없던 아이가 반이 바뀌자마자
표적이 되는 일이 그래서 생깁니다.
분명한 건, 당신은 그 기준을 만들지도 않았고 고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2. 방어해줄 친구 한 명이 없어서

연구에 따르면 불안이 높은 아이가
이후 더 따돌림의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경향은 확인됐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단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 경향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 부분은 오해하기 쉬워서 한 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친구가 생겨서 그 아이의 불안이 없어진 게 아닙니다.
그 아이는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다만 그 불안 때문에 따돌림의 표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옆에 한 명이라도 지켜주는 친구가 있으면
누군가 건드리려 할 때 계산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습니다.
따돌림을 당했다 하더라도 이후 우울과 불안으로 남은 것은,
서로를 친구로 여기는 절친이 없는 아이에게서만 그랬습니다.
정리하면 친구 한 명이 두 가지를 막아준 셈입니다.
표적이 되는 것도, 당한 뒤에 그게 상처로 남는 것도.
즉 똑같은 성격이어도 친한 친구 한 명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따라 결과가 갈렸습니다.
그럼 그 친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어린 아이가 결정할 수 있었을까요.
반 배정은 학교가 했습니다.
전학 여부는 부모가 결정했습니다.
작년에 친했던 애가 올해 같은 반이 됐는지 아닌지는, 첫 학기 첫날 명단이 결정했습니다.
물론 친구를 사귀는 방법은 어느 정도 가정에서 배우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부분이 충분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당신이 고른 게 아니었죠.
3. 첫날, 아무도 끊어주지 않아서
따돌림에는 언제나 첫 번째가 있습니다.
첫 번째 놀림. 첫 번째 웃음. 첫 번째로 자리가 비켜진 순간.
그때 어떤 흐름이 이어졌나요?
선생님이 그 장면을 봤나요?
봤다면 그 놀림을 끊어주었나요?
반에서 한 명이라도 “야, 그만해”라고 해주었나요?
우리나라 따돌림의 특징 중 하나는 지속성입니다.
한 번 피해자가 되면 계속 그 자리에 놓인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처음 며칠이 1년을 결정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첫 장면에서 아무도 제동을 걸지 않으면
아이들은 그걸 ‘해도 되는 일’로 학습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학급 분위기에 따라 결과가 정반대로 나오기도 합니다.
따돌림이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의 반에서는
누군가를 괴롭힌 아이가 오히려 반에서 미움을 받았습니다.
같은 행동입니다.
어떤 반에서는 가해자가 외톨이가 되고
어떤 반에서는 피해자가 외톨이가 됩니다.
차이는 그 교실이 무엇을 정상으로 여겼느냐 하나입니다.
4. 돌아가면서 당한 경우라면
간혹 여성분들이 따돌림 이야기를 하실 때,
“저는 따돌림을 돌아가면서 당했어요”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해진 왕따가 있었던 게 아니라, 무리 안에서 대상이 돌았다는 겁니다.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다가 갑자기 두 달쯤 내가 대상이 된 거죠.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다른 애로 넘어갑니다.
이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걸까요.
또래 무리는 하나의 권력 구조입니다.
무리의 중심에 있는 아이는 구성원을
주기적으로 띄웠다가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자기 영향력을 유지합니다.
먼저 안쪽 무리로 끌어들여 그 아이에게 인기와 인정을 맛보게 합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무리 전체가
그 아이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어,
아이를 순종적인 위치로 떨어뜨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게 집단을 유지하는 장치라는 점입니다.
누군가를 밀어내야 나머지가 뭉칩니다.
그런데 밀려난 사람이 고정되면 나머지는 곧 안심합니다.
안심하면 무리에 매달릴 이유가 사라지겠죠?
다음이 누구일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여야 긴장이 유지되는 겁니다.
그래서 대상을 주기적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여기에 아주 확실한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그 무리에서 1년 동안 대상이 됐던 사람이 몇 명이었나요.
셋이었나요, 넷이었나요.
그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나요?
아마도 누구는 조용했고, 누구는 오히려 말이 많았을 거예요.
원래 인기가 많았던 애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통점이 없는데 똑같이 당했다는 건
원인이 그 사람들 안에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5. 전학, 그리고 아직 미성숙했던 아이들
전학은 아이에게 매우 큰 사건입니다.
이미 서로를 다 아는 아이들 사이에
아무도 나를 모르는 상태로 들어가는 일이니까요.

이 상황에서는 앞의 조건들이 한꺼번에 겹칩니다.
인물-집단 불일치가 최대치입니다.
나만 다른 학교에서 갑자기 나타났으니까요.
그리고 지켜줄 친구가 0명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몇 년치 관계를 쌓아둔 상태고요.
그리고 나에게는 쌓아 놓은 평판이 없습니다.
기존 아이들에 대해서는 다들 여러 해 동안 쌓인 정보를 갖고 있어서
누가 뭐라고 해도 잘 먹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학생은 첫 며칠에 붙은 인상이 곧 전부가 됩니다.
반박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요.
여기에 집단 심리가 하나 더 작용합니다.
사람은 자기 집단과 그 밖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안쪽을 편애하고 바깥을 차별합니다.
상대가 특별히 미워서가 아니라 구분 자체가 그 효과를 냅니다.
동전 던지기로 무작위 배정한 집단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 정도거든요.
그러니까 전학생을 밀어내는 건 전학생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밀어내는 행위를 통해 자기가 안쪽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유독 열심히 그러는 아이가,
대개 무리 안에서 그렇게 안정적이지 않은 아이입니다.
확인이 더 필요한 쪽이니까요.
여기에 나이도 겹칩니다.
청소년기는 뇌가 아직 덜 성숙한 시기이고
또래 사이에서 자기 위치를 잡는 게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지위 경쟁이 가장 격해지는 때이지요.
게다가 서로를 다 아는 반은,
뒤집어 말하면 낯선 사람을 다뤄본 적이 없는 반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대하는 연습이 안 돼 있으니
‘다르다’가 곧 ‘이상하다’가 됩니다.
상대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능력도 아직 덜 자란 상태고요.
쉽게 말해 미성숙했기 때문에, 전학 온 아이를 품어줄 수 없었던 겁니다.
그 반이 나쁜 반이었던 게 아니라,
새로 온 사람을 다뤄본 적 없는 반이었을 뿐입니다.
이건 사실 어른들도 잘 못 하기도 합니다.
부서에 새로 온 사람이 몇 달씩 겉도는 걸 회사에서도 흔하게 보니까요.
다만 의도가 없었다고 해서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1년은 실제로 매우 힘들었고,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쉽게 그들을 용서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정확히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운이 나빴다는 말인가요
그냥 운이 없었다는 말이 위로가 안 된다는 걸 압니다.
오히려 이런 해석은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책은 아프지만, 대신 하나를 지켜줍니다.
“내가 잘못해서 그랬다” 안에는 “그러니까 다음엔 안 당할 수 있다” 가 들어 있습니다.
내가 원인이면, 내가 고치면 되니까요. 통제감은 지킬 수 있는 겁니다.
반대로 “운이었다”를 받아들이는 순간,
부여잡고 있던 그 통제감까지 같이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책을 쉽게 놓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시면 좋겠습니다.
운이 아니라, 조합이었습니다.
그해, 그 반, 그 아이들, 그 선생님, 그리고 당신.
이 조합이 아쉽게도 맞지 않았습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이 잘못 만들어진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 조합 안에 놓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당신은 조합을 고를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어느 반이 될지, 어느 자리에 앉을지,
자기와 성격이 맞는 친구가 있을지,
지독하게 괴롭히는 일진 같은 애가 포함될지.
전부 정해져서 통보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고를 수 있습니다.
어느 회사에 있을지, 어느 모임에 나갈지, 누구를 계속 만날지.

그때 당신에게 없었던 건 어떤 능력이나 자질이 아니라 선택권이었습니다.
지금은 그게 있습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따돌림 연구자들이 반복해서 확인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따돌림은 지위를 얻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
가해자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조사해보면
“존경받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위에 있고 싶다”는 항목과 강하게 연결됩니다.
그래서 따돌림에는 반드시 관객이 필요합니다.
혼자 있을 때 괴롭힌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걸 떠올려보시면 됩니다.
꼭 사람들 앞에서 했습니다. 급식실에서, 복도에서, 수업 시작 직전 교실에서.
당신을 괴롭히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당신을 괴롭히는 자기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관객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행동이었던 거죠.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존경, 인정, 권위를 얻고 싶었을까?
를 생각해 보면, 스스로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했을것으로 봅니다.
자신은 가만히 있어서는 혹은 긍정적인 방식으로는
존경과 인정, 권위가 세워지지 않기 때문에
혹은 반대로 인정 받거나 존경 받지 못할거라는 불안을 갖고 있던 탓에
질이 좋지 않은 방식으로라도 그걸 얻고 싶어했던 것이지요.
정리하면
기본적으로 인정 욕구, 권력 욕구 등이
충분히 가정과 친구 관계에서 건강하게 채워지지 않는 아이들이
따돌림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격이 따돌림당할 만한 애였던 거 아냐?”
환경적 요인이 아니라 결국 성격적 요인이 있는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란성 쌍둥이는 어떨까요?
유전자가 완전히 똑같은 두 아이가 있다면, 둘 다 따돌림을 당했을까요.
실제로 이걸 확인한 연구가 있습니다.
영국의 대규모 추적 연구에서, 열두 살 일란성 쌍둥이 중
한 명만 따돌림을 당한 짝을 30쌍 찾아냈습니다. 아이들 60명입니다.
유전자가 같습니다.
부모가 같습니다.
자란 집이 같습니다.
그런데 한 명은 당했고, 한 명은 당하지 않았습니다.
성격이 전부였다면, 이런 짝이 서른 쌍이나 나올 수 없겠지요.
타고난 것만으로는 결과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내성적인 애가 당하지 않나”
흔히 그렇게들 말합니다.
그런데 연구가 실제로 확인한 건 내향성이 아니었습니다.
혼자가 편한 아이는 위험이 높지 않았습니다.
위험이 높았던 건 어울리고 싶은데
불안해서 못 다가가는 아이였습니다.
이 둘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완전히 다른 상태입니다.
앞의 아이는 혼자 있는 게 편해서 혼자 있는 것이고,
뒤의 아이는 다가가고 싶은데 못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불안에는 기질과 양육환경등이 영향을 미치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불안한 아이가 따돌림을 당했다기 보다는
따돌림을 당해서 불안해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연구 결과 그 크기가 거의 같았거든요.
즉, 지금 사람들 앞에서 위축되는 그 모습이
원래 당신이었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 탓이 나를 계속 힘들게 합니다
“왜 하필 나였을까.”
심리학에는 이 질문에 붙은 이름이 있습니다.
성격적 자기비난(characterological self-blame)
내적이고, 안정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원인에
자신의 피해를 귀속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풀어쓰면 이런거죠.
“나한테 문제가 있는데, 그건 원래 그런 거라 바꿀 수가 없다.”
“내가 좀 더 괜찮은 애였다면 안 당했을 텐데”가 바로 이 문장입니다.
이 귀인은 외로움, 불안, 낮은 자기가치감과 강하게 연결됩니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건 다음 결과입니다.
중학생을 가을부터 봄까지 추적한 연구에서,
성격적 자기비난이 높은 아이일수록 따돌림이 계속됐습니다.
그리고 따돌림이 계속되면 자기비난이 더 강해졌습니다.
즉 “왜 하필 나였을까”라는 질문은 상처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상처를 유지시키는 원인이었습니다.
이유를 찾을수록 자기비난이 깊어지는 구조에 갇혀 계셨던 겁니다.
답을 못 찾아서 괴로웠던 게 아니라, 찾으려 할수록 깊어지는 질문이었던 거죠.
그런데 여기서 한국인에게는 조금 다른 함정이 있습니다.
미국 청소년은 성격적 자기 비난이 우울과 불안을 예측했지만
한국 청소년에게는 행동적 자기비난이 모든 내면화 문제를 예측했습니다.
행동적 자기비난이란 이런 겁니다.
“그때 내가 그 말만 안 했어도.”
“그날 내가 그 자리에 안 갔으면.”
“한 번만 세게 나갔어야 했는데.”
한국에서 자란 사람들은 “나는 원래 그렇다”보다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쪽으로 자신을 갉아먹습니다.
이게 더 교묘한 이유는, 이 생각이 마치 반성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성장하려는 태도처럼 보이니까 멈출 이유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시절의 어린아이에게 지금 어른의 판단력을 가졌어야 했다고 요구하는 겁니다.
열네 살이 할 수 없었던 일을 두고 20년째 추궁하는 셈이지요.
그건 반성이 아니라 학대에 가깝습니다.
자책이 반성처럼 느껴져서 멈추기 어렵다면, [자책에서 벗어나는 법]을 함께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멈추는 방법’을 정리해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왜 하필 나였을까.”
이 질문에는 답이 없습니다.
없어서 못 찾은 게 아니라, 애초에 답이 있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는 그 교실이 만든 자리였고, 당신은 배정된 것이지 선택된 게 아닙니다.
“내가 좀 더 괜찮은 애였다면.”
오래 붙들고 계셨던 그 문장은,
아무도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아서
어린 시절의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문장이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혼자 내린 결론을, 지금까지 데리고 사셨던 겁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런 취급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도 아니었고, 물론 지금도 아닙니다.
조용했던 것도, 눈치를 봤던 것도, 말을 못 걸었던 것도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 교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린 아이가 찾아낸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당신은 그 힘든 시기를 통과했던 것이지요.
그때는 아무도 그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그 반의 누구도요.
20년이 지나서 듣는 말이라 늦었지만, 그래도 한 번은 들으셔야 할 것 같아서 적습니다.
따돌림은 당신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질문을 바꿔보시면 좋겠습니다.
“왜 하필 나였을까”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나에게, 지금 뭐라고 말해줄까.”
이 질문에는 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당신만 쓸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아끼며 사는 삶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답을 쓰는 게 막막하게 느껴지신다면,
[자기 비판 대신 자기 연민이 필요한 이유]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몸이 반응하지 않게 되는 건 다른 일입니다.
이 글을 다 읽고 나서도,
내일 회의에서 아무도 대꾸하지 않으면 심장은 또 덜컥할 겁니다.
20년 동안 만들어진 반응이 설명 한 번으로 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다음 단계는 그 반응이 지금 어디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일입니다.
사람마다 남는 자리가 다릅니다.
어떤 분은 관계가 가까워지는 순간 불안해지고,
어떤 분은 자기 의견을 말하는 자리에서만 막히고,
어떤 분은 인정받아야만 안심이 됩니다.
같은 따돌림 경험이라도 지금 눌려 있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에, 다뤄야 할 것도 달라집니다.
무료 멘탈 진단에서는 40분 동안 그 지점을 함께 찾습니다.
지금 자존감이 어디에서 새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부터 손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정리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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